세종대왕(世宗大王, 1397년 5월 7일 ~ 1450년 4월 8일)은 한국 역사상 가장 성군으로 평가 받는 왕. 진보적이고 학자적인 지도자인 세종은 새로운 형태의 문자 한글을 개발해 일반 국민들의 언해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큰 업적을 쌓았습니다.
세종은 1397년 5월 7일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이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실 부부의 네 아들 중 셋째인 세종은 그의 지혜와 호기심으로 온 가족을 감동시켰습니다.
유교적 원칙에 따르면 양녕대군이라는 큰아들이 조선 왕위 계승자였어야 했는데요. 그러나 왕실에서 그의 행동은 무례하고 도가 지나쳐 세자의 자격을 의심케 했습니다. 양녕의 이런 행동은 세자 책봉을 피하려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둘째 형인 효령대군도 승려가 됨으로써 세자 후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종이 12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충녕대군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10년 후, 태종은 세종을 위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정치의 뒤편으로 물러납니다.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고려 왕조를 전복하고 조선을 개국합니다.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은 쿠데타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조선 개국의 큰 지분을 가지게 되자 형들을 제치고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꿈꾸게 됩니다. 덕보다는 힘을 앞세우는 이방원을 두려워했던 정도전은 혁명의 동지인 이방원을 배제하고 태조에게 여덟째 아들 이방석을 후계자로 선택하도록 설득합니다.
1398년 정도전을 위시로 한 대신들은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며 여러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세력이 다른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하여,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 동복형 이방번이 사망합니다. 이를 제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합니다.
비탄에 빠진 태조는 아들들 간의 골육상쟁에 충격을 받고 1398년 차남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이방과가 조선의 2대왕 정종입니다.
1400년 이방원과 그의 형 이방간의 전쟁,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이방원이 이 정치적 다툼에 승리하여 형 이방간과 가족을 유배보내고 측근들을 처형하며 난이 마무리 됩니다. 그 결과 힘없는 정종은 세종대왕의 아버지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뒷선으로 물러납니다.
태종은 왕으로서 무자비한 정책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충녕대군(세종대왕)의 시아버지와 시동생을 비롯하여 아내 원경의 모든 형제등의 힘이 강해져 외척이 발호 할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들을 처형합니다. 태종의 이같은 숙청은 훗날 세종이 덕으로 정치함에도 안정적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태종은 유능한 군사전략가 겸 지도자로 있으면서 세종 초기 4년간 조선의 군사계획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세종은 학습능력이 좋고 또한 과학과 기술을 사랑했기 때문에, 군사력에 많은 조직적, 기술적 개선을 도입합니다.
조선에서 수세기 동안 화약이 사용되었지만, 세종 하에서 화약과 같은 첨단 무기 제조는 현저하게 확대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1419년 5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그해 6월 19일 이종무를 필두로 한 병력을 거제도 출병시킵니다. 그해 9월까지 조선군은 대마도의 왜구들을 격파해 15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고 150명에 가까운 중국인과 한국인 8명을 구출해 냅니다. 1443년 대마도주는 계해조약을 맺고 조선왕에게 3포를 개항하고 무역권을 허가받고 복종을 맹세했습니다. 이 정책은 무역을 허가함으로써 노략질의 원인을 없애는 데 그 목적이 있었고 실제로 오랜기간 왜구들의 침입이 사라졌습니다.
세종대왕은 과학과 기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이전 기술들과 발명품의 개량을 지지했습니다. 활자 인쇄술을 발전 시키고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습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고 총통의 제작과 사용법을 기록한 책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또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며 고금의 천문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만드는 등 여러 서적을 편찬합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을 가져 세종은 관 하여금 제례 때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습니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1420년 세종대왕은 20명의 최고 유학자들로 구성된 집현전을 설립하였으며, 학자들은 중국과 이전 한국 왕조의 고대 법과 의식을 연구했고,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왕자들에게 유교 고전을 강의 하기도 했습니다.
한글 장제는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1443년 세종과 집현전의 학자들은 한글 소리와 문장 구조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문자 체계를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체계를 고안했는데, 이것은 구어체에서 모든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1446년 훈민정음 창제를 발표하고 모든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처음에 세종대왕은 한글을 천박하다고 폄하하는 양반 선비들의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복잡한 한자 체계를 배우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창제 초기에 한글은 영리한 사람은 몇 시간 안에 한글을 배울 수 있고,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도 10일 안에 한글을 마스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글은 확실히 지구상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문자 체계 중 하나로, 세종대왕이 오늘날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세종대왕의 늘어가는 업적과 함께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뇨병과 다른 건강 문제로 고생하던 세종은 50세 전후에 눈이 멀게 됩니다. 세종대왕은 1450년 5월 18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종대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능력 있는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과학, 정치 이론, 군사 예술, 문학에서의 업적은 세종을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왕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보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신하들과 백성들을 배려했습니다.
오늘날 세종은 대왕으로 불리는 한국의 두 왕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 중의 하나 일 정도로 한국 국민들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얼굴은 초상화는 생활중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1만원권에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2007년 진수한 한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함에 세종대왕이라는 함명을 붙인 이후로 같은 급의 이지스 구축함은 모두 세종대왕급 함정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대중 문화에서도 영화,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다뤄지면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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