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년에서 1368년 사이에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무명의 집단이 초원을 가로질러 역사상 가장 큰 인접 제국인 몽고 제국을 세웠습니다. 징기스 칸이 이끄는 몽골인들은 튼튼한 작은 말들의 등받이 위에서 약 24만 평방 킬로미터의 유라시아를 대륙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몽고 제국은 칸의 핏줄과 밀접하게 연결된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내전이 불안한 지배를 체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쇠퇴하기 전까지 거의 160년 동안 계속 확장하여 1600년대 후반까지 몽골의 지배권을 유지했습니다.
1206년, 후에 칭기즈칸으로 알려진 지역의 통치자 테무친은 이 시기의 몽골 내부의 위험한 내부 전쟁에서 자신의 일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의 카리스마와 그가 행한 법률과 조직 분야의 혁신은 징기스칸에게 그의 제국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도구를 주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곧 중국 북부의 이웃한 여진족과 탕구트족에 대항하여 인근에서 전투를 하며 살아갔지만 1218년 호라즘의 샤 왕족이 몽골 대표단의 교역품을 압수하고 몽골 대사를 처형하는 일이 발생하자 몽골의 군대는 기수를 중앙아시아로 돌리게 됩니다.
지금의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통치자인 호라즘 샤 왕조가 보낸 이같은 모욕에 분노한 몽골 군대는 모든 반대 세력을 몰아내며 서쪽으로 질주했습니다.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전투를 벌였으나, 중국 북부에서 이어진 전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포위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한 기술들은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중동으로 진격해 가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문을 여는 도시들은 살려줬지만,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어떤 도시에서도 풀 한포기 남아나지 않을만큼 철저하게 학살했습니다.
징기스칸 치하에서 몽골제국은 중앙아시아, 중동의 일부, 그리고 동쪽을 한반도의 국경까지 아우르는 거대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1227년 징기스칸은 죽었고, 그의 제국은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스릴 4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러시아와 동유럽에 있는 킵차크 칸국, 중동의 일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몽골, 중국, 동아시아의 칸국이었습니다.
1229년 몽골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쿠릴타이에서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외게데이를 후계자로 선출했습니다. 새로운 칸은 몽골 제국을 사방으로 계속 확장시켰고, 몽골 카라코룸에 새로운 수도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민족적으로 여진족이었던 중국 북부 진나라가 1234년에 멸망했지만, 남부 송 왕조는 살아 남아 있었습니다. 외게데이의 무리들은 주요 도시 키예프를 포함한 루스(현재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도시국가들과 주요 도시들을 정복하면서 동유럽으로 진출합니다. 남쪽을 지나면서, 몽골인들은 페르시아, 조지아, 아르메니아도 1240년까지 점령했습니다.
1241년, 외게데이 칸이 사망하면서 몽고인들의 유럽과 중동 정복이 일시적으로 멈추게 됩니다. 바투 칸의 명령으로 비엔나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때, 외게데이의 사망소식이 전해져 지휘관들의 주의는 흐트러집니다. 몽골 귀족의 대부분은 외게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칸의 뒤에 줄을 섰으나 동유럽 원정에서 귀위크와 틀어진 바투의 방해공작으로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의 소집은 계속 미뤄집니다. 그 결과 4년 이상 몽골 대제국은 통치자 칸이 없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마침내 1246년 바투 칸은 임박한 내전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귀위크 칸의 당선에 동의하게 됩니다. 귀위크 칸의 공식적인 선택은 몽골의 전쟁 기계가 다시 한번 가동에 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 그러나 일부 민족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고, 반면 몽골 제국은 방향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2년 후인 1248년, 귀위크 사망합니다. 다시 한 번, 황실은 칭기즈칸의 모든 아들과 손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고, 그들의 왕국에서 합의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걸렸지만 1251년 쿠릴타이는 징기스의 손자이자,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 칸을 새로운 칸으로 공식 선출했습니다.
몽케 칸은 전임자들보다 관료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사촌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정부내에서 숙청했습니다. 몽케 칸은 1252년에서 1258년 사이에 제국 전체의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몽케 휘하에서 몽고족은 송나라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물론 중동에서의 확장을 계속 시도하였습니다.
몽케 칸 1259년 남송 원정에서 병사하자, 다시 한 번 몽고 제국은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습니다. 황실이 왕위계승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동안, 무슬림 칼리프의 수도를 약탈했던 훌라구 칸의 군대는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이집트 맘루크의 손에 패배했습니다. 비록 동아시아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몽골인들은 서쪽으로의 팽창 정책을 하기엔 무리인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번에는 징기스칸의 또 다른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정권을 잡기 전에 몽골 제국은 내전에 휩싸입니다. 쿠빌라이는 힘겨운 전쟁 끝에 1264년 사촌 아리크부카를 격파하고 제국의 지배권을 잡습니다.
1271년 대칸 쿠빌라이는 자신을 중국 원나라의 시조로 정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여 마침내 남송을 정복했습니다. 마지막 송 황제는 1276년에 항복하여 몽골의 전 중국에 대한 승리를 알렸다. 고려 또한 추가 전투와 외교적 강공작전을 벌인 끝에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를 피하지 못합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의 영토의 서쪽 부분을 그의 친족들의 지배에 맡긴 채 동아시아의 확장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버마, 안남(북베트남), 샹파(남베트남), 사할린 반도를 원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1274년과 1281년 연이어 일본 침략에 실패합니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였고, 원나라의 지배권은 쿠빌라이의 손자 테무르 칸에게 쿠릴타이 없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몽골제국 원나라가 점점 중국화, 한족화 되어가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였습니다.
1335년 원나라는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잃게 됩니다. 흑사병은 몽골 무역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휩쓸며 도시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고려는 1350년대에 공민왕이 등장하여 원의 내정간섭을 물리칩니다. 1369년에 이르러 킵차크 칸국은 서쪽으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잃었습니다. 한편, 차가타이 칸국은 해체되고 지역 군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중국 대륙에서 1368년에 원나라는 중국의 한족 주원장 의해 붕괴되고 대륙엔 명나라가 들어서게 됩니다.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청나라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1635년까지 몽골 지역내에서 세력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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